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글쓰기는 외롭고 절망적이고 어쩌면 불유쾌한 체험이다. 진짜 글쓰기 과정을 즐기는 사람은 흔치 않다. 대부분은 쓰여진 글을 즐길 뿐 종이갈피 사이에 펜을 갈기거나 타이프라이터의 키를 두드리는 실제 작업을 즐기진 않는다.
글쓰기라는 작업을 위해 스스로를 옥죄는 것은 일종의 공포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후의 일각까지 미적거린다. 글쓰기는 끝없는 번잡(煩雜)과 부질없는 의식(儀式)의 반복이다. 마치 야구 투수가 최후에 발을 뻗어 실제 피칭모션을 하기 전에 행하는 무수한 비틀림 동작과도 같다.
종이는 딱맞게 준비되고 타이프라이터와 펜은 제자리에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커피를 꼭 마시거나 아니면 입에 대지도 말아야 한다. 창문은 꼭 닫든지 활짝 열어두든지 아니면 적당히 맞춰져 있어야 한다. 의자는 알맞은 높이로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새로 돋아난 목덜미의 우스꽝스런 반점은 침실 거울에 비춰보고 꼼꼼하게 지워야 한다. 빌딩숲 창문에 옆모습이 비친 아가씨에 대해서도 꼼꼼히 뜯어보고 씹어봐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그래서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되어서야 덧없는 의식은 끝이 난다. 글쓰기는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것이다...... (후략)
- S.R. Bernstein.
The Art of Writing Advertising : Conversations with Masters of the Craft: David Ogilvy, William Bernbach, Leo Burnett, Rosser Reeves, Leo Burnett.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역사는 이제 너무나 복잡해져서 나 자신조차 말할 때마다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또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작정하고 한마디 하면 그때마다 내 말은 엉뚱하게 인용된다. 그래서 이 옴니버스 판의 출판은 이야기를 제대로 바로잡을ㅡ아니면 적어도 확실하게 비틀어버릴ㅡ좋은 기회인 것 같다. 이 판본에 잘못 적힌 게 있다면, 내가 아는 한 그 잘못들은 그걸로 영영 끝이다.
이 책의 제목에 대한 착상은 1971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한 들판에 술에 취해 누워 있을 때 처음으로 문득 떠올랐다. 특별히 많이 취한 건 아니었다. 그저, 돈 한 푼없는 히치하이커인지라 이틀 동안 내리 아무것도 못 먹은 상태에서 독한 괴서Gosser주(酒)를 두어 잔 마셨을 때 취하는, 뭐 그런 정도였을 뿐이다. 우리는 일어나기가 좀 힘드네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켄 월시가 쓴 <유럽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가지고 여행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서 빌린 닳아빠진 책이었다. 십 년도 넘은 일이고, 그 책은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으니 이젠 훔쳤다고 봐야 옳다. 나는 <하루 오 달러로 유럽 여행하기>(그때는 그랬다)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런 재계 인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들판은 내 몸 아래서 굼벵이처럼 천천히 빙빙 돌아갔고, 그 위로 밤이 찾아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인스부르크보다 싸고, 덜 빙빙 돌고, 인스부르크가 그날 오후 내게 저지른 짓 같은 건 저지르지 않을 곳이 어디 있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날 내게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떤 주소를 찾느라 마을을 이리저리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완전히 길을 잃어서 걸음을 멈추고는 지나가던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나는 독일어를 못하기 때문에 이게 쉬운일이 아니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 특정인과 대화를 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고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서로가 하는 말을 이해해보려고 속절없이 애쓰다가 나는 서서히 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인스부르크의 길거리에서 붙잡고 길을 물어볼 수 있었던 그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고른 사람이 하필이면 영어도 못하고 프랑스어도 못하는데다가 청각 장애자였던 것이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손짓을 연거푸 하고서야 나는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분 후 다른 길에서 다른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어봤는데, 그 사람 역시 알고 보니 청각 장애자였다. 그 길로 나는 맥주를 사서 마셨다.
나는 큰맘 먹고 다시 길로 나와서 재시도했다. 내가 길을 물어본 세번째 사람 역시 청각 장애자이며 게다가 시각 장애자이기까지 한 걸 알게되자, 무시무시한 납덩이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나무와 건물들은 어둡고 위협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나는 코트를 단단히 여미고 갑작스러운 돌풍을 맞으며 비틀거리면서 길을 달려 내려갔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혀 미안하다고 더듬더듬 말했는데, 그 사람도 청각 장애자여서 내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늘이 갑자기 노래졌다. 도로가 기울어지며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만일 그때 내가 옆골목으로 홱 피해 들어가 청각장애자 총회가 열리고 있던 호텔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면, 나는 완전히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랬으면 카프카를 유명 인사로 만들고 침을 흘리게 만들었던 그런 종류의 책을 쓰면서 남은 생을 보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나는 <유럽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가지고 들판에 가서 누웠다. 하늘에 별이 뜨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누군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쓴다면 내가 먼저 총알같이 떠날 텐데.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 나는 곧바로 잠이 들었고, 육 년 동안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갔다. 여러 번 목욕을 했고, 그리고 영문학 학위를 땄다. 나는 여자 문제와 내 자전거에 생긴 일들로 속을 많이 태웠다. 나중에 나는 작가가 됐고 많은 글을 썼다. 그 글들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공적이었지만 사실 세상의 빛을 보지는 못했다. 작가들이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코미디와 사이언스 픽션을 합친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망상 때문에 나는 빚과 절망에 허덕였다. 아무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마침내 한 사람이 나타났다. 사이먼 브렛이라는 BBC의 라디오 프로듀서였는데, 그도 코미디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사이먼은 첫 번째 에피소드만 제작하고 BBC를 떠나 자기작품(그는 뛰어난 찰스 패리스 탐정 소설로 미국에서 잘 알려져 있다)을 쓰는데 몰두했지만, 나는 처음 그 일을 가능하게 해준 그에게 무한히 감사한다. 그의 후임으로 온 사람이 전설적인 제프리 퍼킨스다. 원래 그 쇼는 모양새가 좀 다를 예정이었다. 당시 나는 세상에 불만이 좀 있어서 여섯 개의 다른 줄거리를 만들었는데, 방식도 이유도 각각 다르지만 그 결말은 모두 세상이 끝장나는 내용이었다. 제목은 '세상의 종말'이라고 붙일 셈이었다.
첫 번째 줄거리ㅡ이 이야기에서 지구는 새로운 초공간 고속도로를 내기 위해 파괴됐다ㅡ의 세부 사항들을 채워 넣다가, 다른 행성에서 온 인물을 하나 만들어서 독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고 이야기에 필요한 문맥을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이며 지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정해야 했다.
나는 그를 포드 프리펙트Ford Prefect (Prefect는 '제독 혹은 영국 공립학교의 반장'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포트 프리펙트란 이름이 예상과는 달리 튀는 이름이 되어버린 주된 이유는 그것이 포드자동차의 영국 다겐험 공장에서 1938년 이래 약 20년간 내놓은 자동차 모델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ㅡ옮긴이주) 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농담은 물론 미국 독자들에겐 전혀 먹히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미국 독자들은 이 괴상한 이름의 소형차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게 퍼펙트Perfect의 오타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야기에서, 나의 외계인 인물이 이 행성에 연구를 미진하게 한 탓에 이 이름이 "그다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지구의 생명체에 대해 잘못 생각했던 것 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실수가 발생할까? 유럽을 히치하이크할 당시, 내가 얻어들은 정보나 충고가 이미 시효가 지났거나 틀린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여행 경험담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 순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이 문득 떠올랐다. 그 세월 내내 그게 내 머릿속 어느 구석에 숨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포드는 안내서에 들어갈 자료들을 모으는 연구원으로 설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하자마자 그것은 이야기의 중심에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고 나머지는, 오리지널 포드 프리펙트를 만들어낸 창조자로서 말하건대, 전부 허풍이다.
사람들이 알면 놀라겠지만, 이야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쌓여나갔다. 에피소드별로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하나의 에피소드를 마치고 나면 다음 회가 어떻게 될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는 의미다. 줄거리가 종잡을 수 없이 꼬여가다가 어느 순간 어떤 사건이 이전에 일어났던 일에 뭔가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듯이 보이면 나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놀랐다.
이 쇼가 제작되는 동안 BBC의 태도는 맥베스가 사람들을 살해하며 가졌던 태도와 매우 비슷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회의하다가, 다음에는 조심스레 열광하고, 그러다가 이 일의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지 깨닫고 점점 더 놀라게 되지만,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제프리와 나, 음향 엔지니어들이 지하 스튜디오에 몇 주씩이고 계속 처박혀 다른 사람들이 시리즈 하나를 몽땅 다 만들 동안 달랑 효과 음향 하나를 만들고 있었다는 (또한 그 것을 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스튜디오 사용 시간을 빼앗고 있었다는) 소문은 강력하게 부인되었지만 전적으로 사실이다. 이 시리즈의 예산은 점점 치솟아, 마침내는 <달라스>를 몇 초 분량 만들 수 있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 쇼가 성공하지 못했으면, 정말이지....
첫 번째 에피소드는 1978년3월8일 수요일 저녁10시30분에 BBC 라디오 4채널에서 방송되었다. 휘황찬란한 광고 따위는 전혀 없었다. 박쥐들이 이 방송을 들었다. 이상한 개가 울부짖었다. 몇 주가 지나자 편지들이 한두 통 찔끔찔끔 날아들었다. 그러니, 저 바깥의 누군가가 듣기는 했던 것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편집증 환자 안드로이드인 마빈 같았다. 마빈은 그냥 한 장면을 재미있게 해보려고 집어넣었다가 제프리가 고집을 피워서 더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러다가 몇몇 출판사가 흥미를 가지게 됐고, 나는 이 시리즈를 책으로 써달라는 청탁을 영국 팬 북스Pan Books에게서 받게 됐다. 엄청나게 꾸물대고 숨고 변명거리들을 꾸며대고 목욕을 한 후에야 삼분의 이 정도를 겨우겨우 마칠 수 있었다. 그 시점에 그 사람들은 매우 쾌활하고도 공손하게 말했다. 이미 내가 마감을 열 번이나 어겼으니 지금 쓰고 있는 페이지나 마저 쓰고 그 빌어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그러는 동안 나는 또 다른 시리즈를 하나 구상하느라 바빴고, 또 텔레비전 시리즈 <닥터 후>를 쓰고 스크립트 편집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라디오 시리즈, 특히 누군가가 편지를 보내 자기가 들었다고 말하는 그런 시리즈를 갖는다는 건 매우 기분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게 딱히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1979년 9월에 영국에서 출간되었을 때의 상황은 대충 이랬다. 이 책은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1위를 차지하더니, 그냥 그 자리에 계속 눌러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 서문을 쓰면서 내가 성명을 부탁받은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안내서'는 너무나 많은 형태로 나왔다. 책, 라디오, 텔레비전 시리즈, 레코드로 나왔고, 조만간 메이저 영화로도 나오게 된다. 그런데 매번 줄거리가 조금씩 달라져서 심지어 가장 열렬한 독자도 헷갈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여기서 각각의 버전들을 분석하도록 하겠다. 단, 여러가지 연극 버젼은 포함시키지 않겠다. 이 연극들은 미국에서는 상연되지 않은 만큼 괜히 문제만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니까. 라디오 시리즈는 영국에서 1978년 3월에 시작됐다. 첫 번째 시리즈는 여섯 개 프로그램, 혹은 소위 여섯 개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이야기 1에서 6까지. 이건 쉽다. 그해 말에 에피소드 하나가 더 녹음되어 방송되었는데, 그게 이른바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다.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라고 불리는 것은 처음 방송된 날이 12월 24일이었기 때문인데, 사실 그날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다. 그 후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1979년 가을에 첫 번째 <안내서>가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고 불렸다. 이 책은 라디오 시리즈의 첫 번째 에피소드 네 개를 상당히 확징시킨 버전인데, 여기서 어떤 인물들은 완전히 다른 식으로 행동하고, 또 어떤 인물들은 전혀 다른 이유로 똑같은 행동을 한다. 사실 결과야 마찬가지지만 대화를 다시 쓰는 수고는 덜 수 있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더블 레코드 앨범이 출시됐는데, 이것은 책과 반대로 라디오 시리즈의 첫 번째 에피소드 네 개를 약간 축약한 버전이다. 이 앨범들은 원래의 방송을 녹음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똑같은 스크립트를 완전히 새로 녹음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 것은, 우리가 라디오 시리즈의 임시 음악으로 사용한 음악이 축음기 레코드에서 녹음한 것이어서, 라디오에서야 괜찮았지만 상업적 발매용으로는 쓸 만한 것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1월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새 에피소드 다섯 개가 한 주 동안 BBC 라디오에서 더 방송되었고, 이제 전체 에피소드는 열두 개로 늘어났다. 1980년 가을에 두 번째 <안내서>가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하모니 북스Harmony Books가 미국에서 첫 번째 책을 출간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 이 책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라디오 시리즈 7, 8, 9, 10, 11, 12, 5, 6 에피소드(이 순서대로다)를 대부분 새로 쓰고, 새로 편집하고, 축약한 버전이었다. 그게 너무 간단한 일처럼 보일까 봐, 책 제목을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이라고 붙였다. 여기에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라디오 에피소드 5편에 나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밀리웨이스, 다른 이름으로는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이라고 알려진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두 번째 레코드 앨범이 라디오 시리즈의 에피소드 5, 6을 엄청나게 새로 쓰고 확장한 버전으로 만들어졌다. 이 레코드앨범의 제목 역시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러는 동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텔레비전 시리즈 에피소드 여섯 개가 BBC에서 만들어져 1981년 1월에 방송됐다. 이것은 대부분 라디오 시리즈의 처음 여섯 개 에피소드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대부분과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의 뒷부분 절반 정도가 합쳐져 있다. 그런 관계로 이 텔레비전 시리즈는 라디오 시리즈의 기본 구조를 따르지 않은 출판본의 개정 내용을 흡수한 셈이다. 1982년 1월에 하모니 북스는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을 미국에서 출판했다. 1982년 여름, 히치하이커 시리즈 제3권이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출판되었다. 제목은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이었다. 이 책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이미 듣거나 본 어떤 이야기도 토대로 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이 책은 라디오 시리즈의 7, 8, 9, 10, 11,12 에피소드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야기였다. 기억하겠지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이 에피소드들은 이미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이라는 책에 개정된 형태로 들어갔다.
이 시점에 나는 미국에 가서 영화 대본을 썼는데, 그 대본은 그 때까지 나온 이야기와는 앞뒤가 거의 맞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영화 제작이 연기되었기 때문에 (현재 소문에 의하면, 영화 촬영은 최후의 심판일 직전에 시작될 것이라고 한다), 나는 삼부작에 추가되어 마지막이자 네 번째 책을 이루게 되는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를 썼다. 이 책은 영국과 미국에서 1984년 가을에 출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 책 자체를 포함해 그때까지 나온 모든 것과 사실상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로도 아직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나는 인포컴Infocom이라는 회사를 위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의 컴퓨터 게임을 썼는데, 그 내용은 이제까지 이 제목으로 나온 모든 것들과는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유사성밖에 없다. 그리고 제프리 퍼킨스와 같이 정리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라디오 스크립트 원본>을 냈다(영국에서 1985년에 출판). 이 일은 흥미로운 모험이었다.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 방송된 라디오 스크립트 전체를 모아 수록한 것이며, 따라서 히치하이커 출판본 중에서 또 다른 히치하이커 출판본을 정확하고 일관성 있게 반영하는 유일한 예다. 나는 이 점이 좀 마음에 걸렸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그 책의 서문은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책이 나온 '이후에' 쓰였으며,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어떻게 하면 이 행성을 떠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간략한 정보를 준비했다.
<이 행성을 떠나는 법>
1. 나사NASA에 전화하라. 전화번호는 (713) 483-3111이다. 당신이 지금 당장 떠나는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하라.
2. 그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백악관ㅡ(202) 456-1414ㅡ에 있는 아무 친구에게나 전화해서, 나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 좀 해달라고 하라.
3. 백악관에 친구가 하나도 없으면, 크렘린에 전화하라(0107-095-295-9051로 전화해 국제 교환수에게 크렘린을 대달라고 하라). 그 사람들도 백악관에 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지만(적어도 남들한테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친구는 없다), 영향력은 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시도해볼 만하다.
4. 그것도 안 되면, 교황에게 전화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보라. 교황의 전화번호는 011-39-6-6982다. 내가 듣기에 교황의 교환수는 절대로 잘못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가톨릭에서 교황은 '절대무류(無謬)infallible'라고 간주되는데 이를 두고 장난을 치고 있다ㅡ옮긴이주).
5. 이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 신호를 해서 지나가는 비행접시를 정지시킨 다음, 전화 요금 청구서가 날아들기 전에 이 행성을 벗어나는 게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하라.
이제 더 이상 병원의 경쟁상대는 병원이 아니라 호텔이라는 병원이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병원 서비스가 호텔 서비스를 넘어설 수 있느냐고 반문하지만, 도쿄에서 전철로 두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에 있는 가메다 병원을 가보면 호텔을 넘어선 병원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모든 병신이 바다 전망이고, 병실 면적은 6.5평, 1인식 가격은 10만원대, 호텔과 같은 컨시어지(Concierge, 호텔에서 안내는 물론, 여행과 쇼핑까지 투숙객의 요구를 들어주는 서비스)가 있어서, 교통이나 숙박 안내, 면회객 응대 및 방문카드 발행, 병실안내 등 인포메이션 업무는 물론, 환자 진료카드 신청, 등록 지원, 입원실 에스코트, 우편물, 등기, 소포 등 입원실내 배달 등을 지원한다. 이쯤 되면 호텔에 버금가는 서비스 아닌가?
이 뿐 아니다. 모든 층에 간이 조리실을 구비했고, 입원환자식은 16가지 중에서 매일 메뉴를 선택할 수 있으며, 컨시어지가 쇼핑 대행 서비스를 제공하며, 24시간 환자와 보호자를 응대하는 커스터머 릴레이션(Customer Relation) 부서도 운영하고 있다. 병원 내 전용 IC카드로 매점이나 레스토랑 등에서는 캐시리스(Cashless)도 구현했다.
모든 병실에는 TV, 인터넷 , 원내 각종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터치패널식 PC가 구비되어 있다. 이를 통해 식사 메뉴 선택, 의사 소개, 검사나 수술 설명, 룸서비스, 쇼핑과 렌탕, 시설 안내뿐만 아니라 TV 시청과 인터넷 검색도 가능하며, 필요하다면 키보드와 마우스도 제공되고, 영화 시청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24시간 룸서비스가 제공되고, 환자가 희망할 경우 24시간 언제든지 면회가 허용된다. 병실에는 가족이 잘 수 있는 소파베드가 설치되어 있고, 쇼핑 대행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병실 설비는 TV나 인터넷이 가능한 단말기를 비롯하여 전화기, 에어컨, 화장 세면대, 샤워실, 화장실, 옷장과 냉장고, 안전금고, 테이블, 스탠드, 전기포트, 다기세트, 그림액자, 문구류, 샴푸, 바디젤, 목욕 수건, 욕실 매트까지, 게다가 여성 전용 층에는 아로마 테라피, 발 마사지, 헤어 케어, 페이스 트리트먼트, 네일 케어, 의료 가발 상담(Medical Wig Counseling) 등이 제공되고 있다. 호텔 서비스를 넘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놀라긴 이르다. 거의 모든 병원은 영안실을 지하에 두고 싶어 한다. 주변 민가에서 혐오시설로 인식하여 지하에 두길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병원에서는 가장 전망이 좋은 13층, 꼭대기 층에 영안실이 있다. 왜 꼭대기 층인지 물었다. 대답이 걸작이다. 천국이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란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느 말기 암 환자가 이 병원을 방문하여 영안실을 둘러보고는 "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 그리고 이 영안실에 안치되고 싶다"고 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병원에서 환자식은 왜 맛이 없냐고 물으면 거의 비슷한 답이 돌아온다. "환자식은 원래 맛이 없어요. 저염식이거든요." 그런데 이 병원에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환자는 원래 입맛이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반식보다 더 맛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담아 16가지의 메뉴가 식사 때마다 번갈아 가며 제공되고 있다. 또 있다. 환자는 입술이나 손발이 잘 튼다. 그래서 입술이나 손발용 화장품을 제공하고 있고, 환자가 의사의 지시나 검사 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담당 간호사는 채혈이나 검사 등을 실시하기에 앞서 주의사항을 자세히 설명한 후, 그 내용을 병실 게시판에 손글씨로 써 붙여둬서 환자가 잊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다. 병실에는 환자이름 대신에 주치의, 담당의, 담당간호사 이름이 붙여져 있다.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는 1954년 개원한 1,000 병상 규모의 가메다 종합병원 이야기다. 가메다 병원은 도쿄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의 치바현 내 인구 35,000명의 가모사와시에 있는데, 전국 각지로부터 연간 약 100만 명의 환자가 몰려오고 있다. 그것도 전체 환자의 99.7%가 환자나 보호자의 소개로 온다니 할 말이 없다.
자, 이제 병원의 경쟁상대가 더 이상 병원이 아니라 호텔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가? 여기에 호텔보다 한발 더 나간 병원 서비스가 종합상담실 서비스인데, 의료복지상담 뿐만 아니라 개호보험제도(스스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일본의 간병보험제도) 등에 관해서 경험이 풍부한 의사 선생님을 비롯해 의료 사회복지사, 간호사, 케어 매니저 등 전문 스텝이 배치되어 보험신청대행과 케어 플랜(Care Plan) 작성 등 까다로운 헬스케어 업무 일체를 지원해 주고 있다. 호텔에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긋한 착각마저 든다.
뇌는 현재 우리의 내면에서 주목을 끌고 있는 문제와 주제에 대해 오프라인 상태가 돼야 즉흥적으로 가장 잘 반응한다. 이는 휴식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창의적인 프 로젝트에 동원돼야 함을 의미한다. 창의적인 사람들의 작업 방식을 살펴보면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 있다.
흔히 창조적인 작업, 특히 예술가의 작업에 대해 우리는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업무를 마감하는 사무직원의 단조로운 일상과 정반대로 생각한다. 참된 예술가는 예술의 여신이 영감을 전할때 즉흥적으로 일한다고 말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영감은 강요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며 좋은 발상은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샘솟아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상투적인 생각과는 약간 다른 것 같다. 유명한 예술과들과 창조적인 인물들의 작업 습관을 연구하다 보면 처음에는 마치 틀에 박힌 사무직원들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집필할 때 새벽 4시에 일어나 5~6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한다. 오후에는 조깅을 하거나 수영을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밤 9시나 10시에는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이 되면 이 과정이 똑같이 반복된다. 이는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 정확하게 지켜진다. "나는 매일 어김없이 이 일정을 지킨다. 그러다 보면 반복 그 자체가 중요해진다. 반복은 일종의 최면이다. 나는 반복 과정에서 최면에 걸린 듯 더 심원한 정신 상태에 이른다."
당연히 모든 소설가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작업을 했거나 하고 있다.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은 아침 8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9시가 되면 서재 문을 닫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정오가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접근이 금지됐다. 방문객은 물론이고 전화도 받지 않앗다. 가족에게조차도 그의 작업을 방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이들도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야 했다. 그는 그 시간에 정신이 가장 맑았기 때문에 그동안 뭔가를 써내기 위해 스스로 엄청난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이런 생황은 거의 매일 이어졌고 일요일이나 휴가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작업 방식은 마치 공무원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는 7시에 일어나 8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에 책상에 앉았다. 이때부터 오후 2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지켰다. 심지어 아무런 발상이 떠오르지 않는 날에도 이렇게 했다. 디킨스의 동생은 형의 작업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청 공무원도 이보다 더 규칙적이거나 꼼꼼하지 않았다.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시간을 엄수했고 기계처럼 규칙적으로 행동했다. 단조롭고 따분한 틀에 박힌 일을 하는 사람도 이보다 더 정확할 수는 없었다."
엄격하게 규칙화된 작업 방식은 작가들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미국의 저술가 메이슨 커리(Mason Currey)는 자신의 블로그 '일상의 습관(Daily Routine)'과 이 블로그의 글을 모아 출간한 책 <리추얼(Daily Rituals)>에서 위대한 창조자들로 손꼽히는 160여 명의 소설가, 작곡가, 화가, 철학자, 조각가, 영화감독, 과학자들의 작업 습관을 조사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 중 어느날 갑자기 창조의 여신이 문을 두드려 영감을 전할 때까지 기다린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위대한 창조자들은 대부분 뇌를 활성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 엄격한 작업 습관을 지켰다.
(중략)
차이콥스키는 점심 식사 후에 두 시간 산책을 했는데, 자주 생각에 잠겻꼬 멋진 악상이 떠오르면 지체 없이 기록해뒀다가 나중에 피아노로 연주했다. 베토벤도 그와 유사했다. 그의 비서인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는 이렇게 말했다. "베토벤은 새벽에 일어나 곧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커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끝내고 책상에 앉아 점심 식사를 할 때인 오후 2~3시까지 작업했다. 간혹 휴식을 취하기 위해 산책을 했는데, 그는 산책하면서도 작업했다. 반 시간 또는 한 시간이 지난 후 새로운 악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작곡을 했다. 벌이 들판의 꽃에서 꿀을 모으듯이 그는 들판을 산책하며 악상을 모앗다. 그리고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산책을 했는데,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나 햇볕이 뜨거운 날도 예외가 없었다."
찰스 디킨스는 오후 2시부터 세 시간에 걸친 긴 산책을 했다. 편안한 휴식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작업의 연장이었다. 그는 시골길이나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소설의 줄거리를 구상했다. 그렇게 산책을 하면서 "표현할 그림들을 찾아다녔다".
* 토론의 제 1 법칙 바보와 언쟁하지 마라. 어느 쪽이 바보인지 구별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 머피의 상수(常數) 물건이 망가질 확률은 그 가격에 비례한다.
*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모든 물체의 위치를 동시에 알 수는 없다. [발전형] 없어진 것 하나를 찾아내면, 다른 것 한 개가 없어진다.
* 질레트의 이사법칙 전번 이사 때 없어진 것은 다음번 이사 때 나타난다.
* 클립스타인의 법칙 (시험제작과 생산에 대한 응용) - 16번째의 맨 마지막 나사를 다 풀기까지는, 자신이 엉뚱한 커버를 떼어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 엑세스 커버에 달려있는 16개의 나사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자신이 가스켓을 끼워넣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오브라이언의 고찰 어떤 것을 가장 빨리 찾아내는 방법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 얼간이 법칙 찾는 물건은 항상 마지막에 찾아보는 장소에서 발견된다.
* 얼간이 법칙에 대한 블로크의 반론 찾는 물건은 항상 맨 처음 찾아보는 장소에 있는데도, 처음에 찾을 때에는 발견하지 못한다.
* 듀드의 2원성 법칙 두 가지 사건을 예상할 수 있는 경우, 보다 좋지 않은 쪽이 발생한다.
* 비정상적인 조직에 대한 오웬의 이론 모든 조직에는 비적임자를 위한 부서가 마련되어 있다. [발전형] 전임 비적임자가 떠나면, 즉각 후임 비적임자가 충원된다.
* 소시지의 원리 소시지를 좋아하는 사람과 법을 존중하는 사람은 그것을 만드는 과정을 결코 보아서는 안된다.
* 에머슨의 고찰 어느 천재의 위업에도 스스로 거부해 버렸던 우리 자신의 아이디어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 H.L 멘켄의 법칙 할 수 있는 자는 실행한다. 할 수 없는 자는 가르친다.
* H.L 멘켄의 법칙에 대한 마틴의 확장 가르칠 능력이 없는 자는 관리한다.
* 에토레의 고찰 다른 쪽 줄이 더 빨리 줄어든다.
* 에토레의 고찰에 대한 오브라이언의 변형 빨리 줄어드는 줄로 옮기면, 원래 있었던 줄 쪽이 더 빨리 줄어들기 시작한다.
* 레이놀드의 기후학 법칙 바람의 속도는 머리손질 비용과 비례한다.
* 존즈의 동물원과 박물관 법칙 가장 흥미로운 것에는 이름표가 붙어있지 않다.
* 에드의 방사선과의 법칙 엑스레이 촬영대가 차가우면 차가울수록, 그만큼 더 몸을 밀착시켜 달라는 지시가 따른다.
* 모저의 스포츠 관전 법칙 화끈한 플레이는 득점판에 눈길을 돌릴 때나 핫도그를 사러 갈 때 이루어진다.
* 와그너의 스포츠 보도 법칙 카메라 초점을 맞춘 순간, 남자선수들은 으레 침을 뱉거나 코를 후비거나 사타구니를 긁거나 한다.
* 파우스너의 집안일 규칙 무딘 칼이 손가락은 잘도 밴다.
* 스코프의 법칙 아이들은 더러운 바닥에는 아무 것도 흘리지 않는다.
* 밀턴의 페인팅 법칙 잘못 칠한 페인트는 재료와 성질에 관계없이 절대로 벗겨지지 않는다.
* 쇼핑백의 법칙 집에 가는 길에 먹으려고 생각한 초콜릿은 쇼핑백 맨 밑바닥에 있다.
* 호로위츠의 법칙 라디오를 틀면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곡의 마지막 부분이 흘러나온다.
* 최후의 법칙 안될 듯한 일이 뜻밖에 잘 풀리는 경우, 안되는 쪽이 결과적으로 이로울 때가 많다.
우선 제가 앉아서 말하는 걸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는 일어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넘어지고 말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끔찍스러운 오 분을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스무 명이나 서른 명 앞에서 보내게 될 것이라고 믿어 본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200명에 달하는 친구들 앞에 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앉아 있으니 제 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연단에 오르게 된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작가가 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즉 제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수 없이 그렇게 된 겁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이 수상식장에 참석하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병에 걸리려고도 했고, 폐렴에 걸리는 방법도 찾았으며, 이발사가 목을 자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이발소에도 갔고, 마지막으로 이처럼 아주 공식적이고 격식 있는 모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양복도 입지 않고 넥타이도 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셔츠 바람으로 어디든 가도 상관없는 베네수엘라에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이곳에 있기는 합니다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제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학창 시절에 보고타의 일간 신문 <엘 에스펙타도르> 문학 지면 책임자였던 에두아르도 살라메아 보르다가 기사를 쓰길 거기서 새로운 작가 세대가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방을 둘러봐도 새로운 단편 작가나 소설가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그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자책하며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그가 책임자로 일하는 신문에서 널리 알려진 나이 든 작가의 작품은 실어 주었지만, 젊은 작가의 작품에는 어떤 지면도 할애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글을 쓸 만한 젊은이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세대의 동료들과 연대해야겠다는 감정이 솟구친 저는 단편 소설을 한 편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와 아주 친했던, 아니 적어도 나중에 막역한 사이가 되었던 에두아르도 살라메아 보르다의 입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책상에 앉아서 단편을 쓰고는 그 작품을 <엘 에스펙타도르> 사무실로 보냈습니다. 그다음 주 일요일에 두 번째로 경악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신문을 펼쳤는데 한 면 전체에 제 단편이 실려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에두아르도 살라메아 보르다가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는 짤막한 기사가 덧붙어 있었습니다. 확실히 이 단편과 더불어 콜롬비아 문학의 천재가 태어났다, 혹은 이와 비슷한 말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앓아누웠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제 에두아르도 살라메아 보르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것, 그것이 해답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무엇을 주제로 쓸지 고민했습니다. 이야깃거리를 찾아야만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다섯 권의 책을 출판한 지금 여러분에게 증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작가라는 직업은 아마도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힘들어지는 유일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날 오후에는 자리에 앉아 쉽게 단편 소설을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한 쪽을 쓰기도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쉽게 쓴다는 면에서 첫 작품을 쓸 때와 지금은 비교가 안 됩니다. 제가 작업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자면,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과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제가 얼마나 글을 쓸 수 있을지, 어떤 것을 쓰게 될지 전혀 모릅니다. 무언가 생각이 떠오르길 기다리고, 글을 쓰기에 좋다고 판단되면 한참 동안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이 무르익도록 놔둡니다. 작품 구상이 끝나면(가끔씩 긴 시간이 흐르기도 합니다. <백년의 고독>의 경우 그 작품을 구상하는 데 십구 년이 걸렸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구상이 끝나면 앉아서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 지점에서 가장 어렵고 저를 가장 지겹고 따분하게 만드는 부분이 시작됩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달콤한 부분은 그 이야기를 착상하고, 그것을 살찌우고, 계속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앉아서 글을 쓰는 시간에는 이미 작품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적어도 제 경우네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자꾸 머릿속에서 빙빙도는 생각이 중요한 겁니다.
<후략>
'나는 여기에 연설하러 오지 않았다.' (Yo No Vengo a Decir Un Discurso.)
나이지리아 북부의 잡목이 무성한 시골 지역에 사는 농부들은 작물을 재배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꾸려 나간다. 마을이 듬성듬성 군락을 이루는 이 지역의 주민들은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차드 호로 흘러드는 강과 개천에서 농사에 필요한 물과 영양분을 얻는다. 하지만 사막 기후 같은 고온 건조한 기후 조건 때문에 농사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음식이 빨리 상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며칠 만에 음식이 썩어 버린다. 물론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냉장고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속사정은 그리 만만치 않다. 주민들에게는 냉장고를 살 돈이 없으며, 게다가 전기 사정도 여의치 않다.
나이지리아의 북쪽 경계에 인접한 두체 주의 지가와 주립 기술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치고 있는 모하메드 바 압바(Mohammed Bah Abba)는 오랫동안 이 지역의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해 왔다. 그는 1990년대에 유엔 개발 프로그램의 지가와 지역 사무소에서 파트타임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마을 사람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그들이 겪는 문제의 어려움과 심각성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 사는 여자들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일부다처제 관습에 얽매어 차별 대우를 받고, 또 푸르다(purdah)라고 부르는 종교적 규율 때문에 하루 종일 집 안에 갇혀 지냈다. 그 때문에 수확한 농장묵을 큰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은 나이 어린 소녀들의 몫이었다. 소녀들은 먼 거리를 걸어다녀야 했고, 그래서 학교에 갈 시간이 거의 없었다. 작물을 제시간에 팔지 못하면 헐값에 넘기거나 쓰레기로 버리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수입마저 줄어들고, 간혹 상한 음식을 먹어 치우다가 질병이 발생하기도 했다. 압바는 주민들이 겪는 건강, 복지, 교육에 관한 모든 문제들은 채소와 과일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작은 실천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압바가 언급하는 것처럼, '푸르다 관습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압바는 발명가도 아니고 사업가도 아니기 때문에, 뭔가를 새롭게 개발하거나 많은 돈을 투자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대신 전기 없이도 가능하고, 기존의 재료나 기술을 이용할 수 있으며, 보수적인 이슬람 주민들이 수긍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해결책을 찾아내야 했다. 즉, 압바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토기를 만드는 집에서 자라난 압바는 예전에 토기가 나이지리아 사람들에게 삶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토기는 음식을 담는 그릇에서부터 장례식에 사용하는 관에 이르기까지, 나이지리아 사람들의 모든 일상을 구석구석 차지했다. 그러나 알루미늄과 플라스틱 용기가 들어오면서부터 토기는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토기를 빚는 모습은 이젠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압바는 여전히 할머니에게서 배운 기술들을 잊지 않고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압바의 머릿속에 문득 중학교 때 배운 과학 원리가 떠올랐다. 액체가 증발할 때 주위의 열을 빼앗아 가는 간단한 원리였다.
우리는 과학자가 아니라도 개가 혀를 늘어뜨리고 헐떡이는 까닭이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땀이 증발할 때 시원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후덥지근한 우림지역보다 건조한 사막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도 똑같은 원리다. 즉 기온을 떨어뜨릴 수 있 가장 자연적인 방법은 증발에 있었다. 여기서 압바는 무엇을 떠올렸던 것일까? 그건은 바로 항아리였다. 정확히 말해서 항아리 두 개로 만드는 냉각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을 만드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우선 큰 항아리 안에 작은 항아리를 넣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젖은 모래를 넣어 두 항아리 표면을 젖게 만든다. 그 다음에는 젖은 천으로 안쪽 항아리에 뚜껑을 씌운다. 그러면 두 항아리 사이에 있던 증기가 바깥 항아리의 표면을 통해 공기 중으로 증발하면서, 안쪽 항아리의 내부 온도가 떨어진다. 또한 젖은 모래는 단열 효과도 있다. 안쪽 항아리의 온도가 떨어지면 높은 온도에서 왕성하게 번식하는 해로운 미생물의 활동도 막을 수 있다. 결국 과일과 채소를 싱싱하게 보관할 수 있는 것이다. 압바가 생각해 낸 이 시스템이야 말로 간단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아이디어였다.
항아리 냉장고는 상온보다 훨씬 차가운 온도에서 음식물을 보관할 수 있었다. 압바는 몇 차례 실험을 실시했다. 상온에서 3일만에 시들었던 채소들이 압바의 항아리 속에서는 한 달 가까이 신선도를 유지했다. 후추와 토마토는 3주 동안 숙성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24시간이면 시들었던 시금치도 12일간 신선도를 유지했다.
압바는 자신의 월급을 털어 가마를 만들고 지역에 사는 도공을 고용해 항아리를 굽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만든 항아리 5,000개는 주민들에게 공짜로 나누어 주었다. 항아리 하나의 원가는 1달러 미만으로, 매우 저렴했다. 그 이후 압바는 원가에 10센트의 이윤만 붙여 항아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압바의 도공들은 하루에 평균 다섯 개 정도의 항아리 냉장고를 만들 수 있었다.
이제 이 지역 농부와 상인들은 항아리 냉장고 덕분에 농작물을 집에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두체 지역에 살고 있는 10만명의 주민들에게 높은 가격을 받고 신선한 농작물을 팔고 있다. 압바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음식이 상할까 봐 시장으로 달려갈 필요가 없게 되었어요. 항아리에 보관해 두었다가 살 사람이 나타날 때 팔 수 있게 된 거죠. 농가의 수입도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여성들이 집에서 작물을 팔 수 있게 되면서 경제활동이 가능해졌죠. 그동안 남편에게만 의존했던 그들의 경제생활도 달라졌습니다." 여인들은 '조보'라는 음료수를 항아리에 보관해 놓고 팔기도 했다. 여기서 얻은 부수입은 비누 같은 생필품을 사는 데 썼다. 그리고 매일 먼 시장까지 걸어가서 채소와 과일을 팔아야 했던 소녀들도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2년에 걸쳐 다양한 시도를 하는 동안(모래 대신 낡은 이불을 넣어 보기도 했다) 압바의 노력은 널리 알려졌다. 주변의 찬사와 더불어 상까지 받았다. 2006년에는 10만 개 이상의 항아리 냉장고가 팔려 나갔으며 나이지리아 전역으로까지 판매가 확대되었다. 아프리카 동부 에티오피아 바로 위에 위치한 에리트레아에서는 이 항아리를 좀 더 개량해 시골 외곽에 있는 당뇨병 환자들을 위한 인슐린 보관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200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 두 사람이 우리 업계가 갖고 있던 가장 오랜 질문을 풀기 위해 나섰다.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는 광고를 더 효과적으로 만드는가?
벤 쿠젠(Ben Couzen)과 짐 잉그램(Jim Ingram)은 평범한 상품을 하나 선택했다. 이베이(ebay)에 내놓을 BMX 자전거 한 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에는 평범한 광고문이 붙어 있었다.
'릴라이언스 부메랑 BMX 팝니다. 상당한 희귀 모델. 포크와 바에 녹 약간 슬었음. 클레이턴으로 가지러 오실 분께만. 즐거운 입찰 되시길.'
두 사람은 이 자전거를 27.50달러라는 평범한 가격에 구입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산 바로 그 상품을 다시 그 매체에 팔려고 내놓았다. 그들은 여기에 크리에이티비티를 덧붙였다.
<쿠젠스와 잉그램의 최강의 죽이는 Wicked Sick BMX>
'BMX 초절정 익스트림 2000. 최강의 죽이는 BMX 팝니다. 릴라이언스 부메랑. 수없이 많은 익스트림 스턴트를 해왔음. 판매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놈으로 스턴트를 해왔음. 한 번은 완전 끝내주는 묘기를 했더니 어떤 여자애가 끝내주는 대박 스턴트를 보기만 한 걸로 임신해버렸다는 전설.
그럼 이 죽여주는 BMX의 사양을 알려드리겠음. 사진에 나온 거 다 따라감. 거기에 서스펜션 후면 포크까지 드림. 바퀴 두 개, 안장 하나. 게다가 죽여주는 닉 네임까지 무료로 드림. 무료로 드릴 이름은 '사악한 스틱스'. 손잡이와 전면 포크에 약간 녹 있음(쉽게 없앨 수 있음). 후면 포크에 녹 좀 더 많이 있음(사진에 나옴). 타이어에 구멍은 없지만 살짝 낡았음. 기본적으로 낡은 BMX. 그렇다고 이 놈의 근사함에 손상이 가진 않았음.
이 BMX로 부린 묘기는 다음과 같음. 엔도스(endos, 앞바퀴만으로 달리기) 234회, 끝내주는 휠리스(Wheelies, 앞바퀴 들고 타기) 687회, 스키드(Skid, 회전 않고 미끄러지기) 143,000회, 바니 홉스(Bunny Hops, 장애물 넘기) 2회(바니 홉스는 게이 같지만 동생 녀석이 해보라고 하는 바람에, 이 녀석한테 완전 제대로 훅 갔기 때문에 해 봤음), 플립아웃(Flipouts, 방향 바꾸기) 28회. 기본적으로 이 자전거를 구입하면 전세계 모든 BMX 클럽의 회원이 되게 돼 있음. 죽여주는 사람이 될 테니까.'
이 입찰이 올라온 첫 날 입찰가는 55달러까지 올라가 처음 구매액의 2배가 됐다. 문의 글도 수십 개가 올라왔다. 한 입찰자는 이런 질문을 했다. "스키드는 얼마나 길게 할 수 있죠?" 벤은 이렇게 답글을 달았다. "주행 기록계에는 128.922미터라고 나왔어요. 그런데 한 번은 스키드 하니까 2주 가던데요."
둘째 날이 되자 '지금껏 본 중 최고의 이베이 광고'와 같은 제목의 블로그 포스팅들이 여러 건 등장했다.
셋째 날이 되자 이 광고의 카피가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과자를 먹다가 '이 사과 튀김 완전 제대로 훅 보내네'라고 트윗을 날렸다. JP 오브라이언(O'Brien, 유명 경마 기수)은 페이스북에 'JP 오브라이언이 한 번은 스키드 하니까 2주 가던데요'라고 자랑했다.
이 자전거는 마침내 134.50달러에 팔렸다. 원래 구매했던 가격의 다섯 배 액수였다. 이게 크리에이티비티의 가치이다. BMX를 이베이에 내놓을 때 크리에이티비티가 어떤 가치를 갖는지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광고에서 크리에이티비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말들이 있다. 아마도 빌 베른바흐(Bill Bernbach)의 탁월한 설명이 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조언일 것이다.
"광고가 눈에 띄지 않으면 그 외 다른건 다 탁상공론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많은 광고들이 눈에 띄지 않은채 사라진다. 지난 24식간을 생각해보자. 지난 24시간 동안 당신은 수많은 광고들에 노출됐다. 2007년 얀켈로비치 연구소에서는 도시 거주민들은 하루 3,000건의 상업적 메시지에 노출된다고 추산했다. 지금 몇 개나 기억나는가? 1퍼센트? 그럼 30건이다. 계속해보자. 뭐가 생각나는가?
하버드 대학 연구소에서는 마케터들이 매일처럼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려 애쓰는 광고 수천 건 중에서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76건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나머지 광고의 메시지도 그나마 관심이 없노라고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무의식이 너무나 효율적으로 걸러내는 바람에 완전히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은 76건 중에서도 12건만이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남긴다. 그 12건 중에 다음날까지 2건을 기억한다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미국의 사업가인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난 광고비 절반은 갖다 버리는 거란 걸 압니다. 근데 어느 쪽 절반인지 모르겠단 말이요."
하버드 연구소와 얀켈로비치 연구소가 옳다면, 우리는 광고비 중 절반 훨씬 이상을 버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많은 광고가 눈에 띄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5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광고인이었던 하워드 고시지(Howard Gossage)는 "광고를 잃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광고를 읽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걸 읽고, 어쩌다 그게 광고일 뿐이다."
크리에이티비티의 고전적 사례들은 마치 트로이의 목마 같다. 마케팅 메시지를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게끔 흥미로운 아이디어로 포장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찌 피해볼 도리 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상업적 메시지들의 포화 속에 어떤 메시지를 단연 두드러질 만큼 흥미롭게 느끼게 된다.
지금 시장에는 대중적 소비자는 사라지고 똑똑해진 고객들이 나타났다. 마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파로스(Pharos) 등대처럼.
2,300여년 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왕국을 건설한다. 그는 정복지마다 70여 개의 알렉산드리아 시를 세웠으며 그중 이집트의 나일강 하구에 세운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부장이었던 프롤레마이오스는 이집트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프롤레마이오스 왕조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리아가 활발한 동서 문화 교류의 역할을 해 번창한 나라가 되자 프롤레마이오스 왕은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등대를 건설하고자 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소스트라투스(Sostratus)에게 거대한 등대의 건축을 맡겼다.
소스트라투스는 135m에 달하는 세 개의 층계로 된 세계 최초의 등대를 설계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등대는 아래층은 4각형, 중간층은 8각형, 꼭대기층은 원통형이다. 이 등대의 상단에는 커다란 램프가 설치되어 불길이 타올랐고 반사경으로 바다를 비추어 40km 떨어진 곳에서도 이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이 거대한 대리석 등대는 700여년 전에 대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20세기 들어 바다 밑에서 잔해가 발견되었다. 2,300여년전에 어떻게 이러한 거대한 지을 수 있었고 어떻게 등대의 불을 지폈는지 아직도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아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꼽힌다.
이 등대의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Pharos) 섬에 있어서 '파로스 등대'라고 불리지만 이 등대를 건설했을 당시에는 '프롤레마이오스 등대'라고 불렸다. 그러나 실제로 이 등대에 새겨진 이름은 '소스트라투스'이다. 이 등대의 건축을 명한 프롤레마이오스 왕은 등대의 상단에 자신의 이름을 조각하도록 명령했다. 건축가인 소스트라투스는 이 건축물이 자신에 의해 설계되었음을 후대에 알리고 싶었으나 자신의 이름을 건축물에 새긴 것이 발각되면 처형당할 상황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소스트라투스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등대 상단의 대리석에 자신의 이름을 먼저 새겼다. 그리고 그 위에 석회석을 바르고 왕의 이름을 새겼다. 왕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있고 사람들이 '프롤레마이오스 등대'라고 부르는 것에 만족했다. 몇 십 년이 지나 왕이 죽자 그 등대의 상단에 있는 '소스트라투스'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대리석 위에 덧칠했던 석회석이 오랜 세월 동안 태풍과 비바람에 서서히 벗겨지고 아래의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왕의 권위 때문에 덧칠을 해놓은 석회석에 왕의 이름을 새겨 놓았으나 석회석과 함께 왕의 이름은 날아가버렸다.
파로스 등대는 세계 최초의 등대이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지만 이 같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숨어 있는 등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파로스 현상'이라 부른다. 파로스 현상은 감추어져 있던 본질이 충격이나 자극으로 인해 드러나는 현상이다. 원래 대리석에 새겨진 이름은 건축가의 이름이었으나 왕의 권위 때문에 석회석 위에 왕의 이름을 새겼던 것이다. 그러나 태풍과 비바람으로 석회석이 서서히 없어지면서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대조 효과를 이용하면
소비자를 더 비싼 제품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는 연구가 있다. 고려대학의 이지헌 박사, 석관호 교수는 제품의 가격 제시를 내림차순으로 제시할 경우 더 비싼 제품을 선택할 확률이 증가하게 된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사람들이 맥주를 선택하는 데 있어 메뉴를 달리했을 때 어떤 가격의 맥주를 더 선호하는지를 조사했다. 레스토랑
하나를 빌리고 총 8주 정도의 시간 동안 관찰하였다. 1, 3, 6,
7주는 오름차순으로 메뉴를 구성하였고, 2, 4, 5, 8주는 내림차순으로 메뉴를 구성하였다. 그러고는 평소와 동일하게 손님을 맞았다. 이 레스토랑에 온 손님들은
메뉴의 순서가 내림차순인지 오름차순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총 8주의
시간이 지나고 실제의 매출을 분석했다.
결과는
도포와 같았다. 내림차순으로 메뉴를 구성하였을 때 더 높은 가격의 맥주가 팔리고 있었다.
*도표: 내림차순 – 판매수입평균 6,020원 / 오름차순 – 판매수입평균 5,780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내림차순으로 메뉴가 제공되면 최초의 메뉴가 가장 비싸다. 최초로 접하는 맥주가 가장 고가의 제품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접하는 맥주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품으로 인식된다. 전형적인 대조 효과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다른 관점으로
표현하면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라고도 한다. 이것
역시 최초에 제시된 정보에 영향을 받아 이후의 정보와 대조 효과가 벌어지는 현상이다.
참조: Kwanho Sul. Jiheon Lee, Donald R.
Lichtenstein (2012).
컬럼비아 대학의
란 키베츠(Ran Kiverz) 교수는 스탬프를 10번 받으면
무료로 커피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쿠폰과 12번 도장을 받아야 하지만 이미 두 개가 찍혀있는 쿠폰을
비교한 적이 있다. 공짜로 커피를 마실 때까지 걸리는 시간, 그러니까 10잔을 누가 더 빨리 사먹는지를 비교해본 것이다.
실험 결과, 스탬프가 이미 찍혀있는 쿠폰을 갖고 있었던 고객들이 10잔을 사
먹는 데 걸리는 시간이 20%나 더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쿠폰을 가진 고객들은 상점 내 점원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더 자주 웃으며 더 많은 정서적
상호 작용을 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같은 10개를 찍어야
하지만 미리 2개가 찍혀있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한 것이다.
실험에서
나타나듯이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구에세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면 동기부여수준이 높아지며, 가능한 목표
거리를 짧게 하면 목표 가속 효과가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핵심이다.
참조: Ran Kivetz, Oleg Urminsky, Yuhuang Zheng
(2006).
런던의 그레이트 오몬드 스트리트 병원(Great Ormond Street Hospital)의 소아집중치료부 주임의사는 텔레비전으로 포뮬러원 자동차 경주를 보다가 영감을 얻었다. 그는 정비 급유 요원들이 불과 몇 초 안에 정밀하게 짜인 순서대로 경주용 차를 완벽하게 손보는 걸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 병원에선 환자를 외과수술실에서 집중치료실로 옮길 때마다 혼잡을 겪곤 했던 것이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그는 페라리 경주 팀원들을 불러 병원 스태프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이색적인 요청을 했다.
이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경주차 정비 팀의 기술을 응용해 새로운 행동 양식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모든 역할에서 할 일과 정해진 시간을 도표화해 소리를 질러 의사소통을 해야 할 필요성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중요한 환자 정보를 넘겨줄 때 체크리스트를 단계별로 훑게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페라리-영감이 이끌어낸 변화로 기술상의 실수는 42% 줄었고, 정보상의 실수는 49%까지 줄였다고 한다.
참조: 가우탐 나이크(Gautam Naik)의 2006년 11월 14일자 <월스트리트저널>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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