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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바닥에서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 허지웅

by ArthurDent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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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 Andreas-Salomé, Paul Rée and Friedrich Nietzsche (1882)

 

[허지웅 칼럼] 삶의 바닥에서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해왔다. 지금이 밑바닥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나는 대답했다. 더 이상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때가 밑바닥인 것 같습니다. 거기 이르고 나면 여기서 더 망해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 생존을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됩니다. 배고픈 건 주워 먹으면 되고, 기분 나쁜 건 내가 못났으니까 하고 넘기면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뭐든 할 수 있고 또 뭐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삶이 알려준 값비싼 교훈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바닥을 찍고 고비를 지나 안정을 되찾게 되면 우리는 매번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머리로 알더라도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 입으로는 말할 수 있어도 정작 나 자신에게 적용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바닥에서 깨달았던 것들은 삶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그럼에도 그게 언제 그랬냐는 듯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거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들을 까먹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실수를 반복한다.


지난 보름 내내 내가 그런 상태였다. 애초 들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대화를 하려 노력했다.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면 반드시 소통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졌다. 그렇게 해야 뭔가를 바꿀 수 있는데, 라며 마음을 쥐어짰다.


기만이었다. 애초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지난 십수년 동안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배웠던 교훈이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투병 후에는 비평도 그만두고 사회적인 어떤 발언도 노력도 하지 않기로 한 뒤 내 주변의 삶을 글로 담는 작업과 청년들이 나 같은 20대를 보내지 않게 만드는 문제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찰나의 순간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건강을 되찾은 내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오만이었다. 설상가상 오랫동안 신뢰했던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뒤통수를 치고 나섰다. 결국 건강만 나빠졌다.

나는 솔직히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 재발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 기다리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환멸이 느껴지고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세상의 추악한 것들로부터 가장자리로 밀려나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살 가치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하루 수십개씩 받으면서 거기에 대고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나 자신이 역겹다. 원고 마감일은 이미 며칠 전에 지났고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니체를 다시 읽기로 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어쩌면 이건 그냥 사랑 이야기다. 내게 있어 니체의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는 단연 운명 애(아모르 파티)와 영원회귀다. 권력의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두 개념은 서로 다른 저서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 따로 떨어뜨려 이해할 수 없다. 운명애와 영원회귀는 하나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지상 명령과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이어져 있다는 건지 말하려면 일단 애처롭고 창피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 니체의 사랑 이야기부터 해야만 한다. 니체와 그의 친구 레, 그리고 그들이 사랑했던 루 살로메 이야기다.


니체는 문헌학계의 스타로 출발했지만, 철학자로 변모한 뒤 주로 멸시와 조롱을 받게 된다. 초기 철학은 대부분 쇼펜하우어로부터 영향받은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삶은 고통이다. 빠져나올 방법이 없는 고통이다. 칸트가 물자체라 불렀고 쇼펜하우어가 의지라 불렀던 세계의 진실에 닿기 위해 쇼펜하우어는 해탈을 요구했다. 말이 길지만 한마디로 어렵다는 이야기다. 더 짧게 말하자면 ‘우린 안 될 거야’라는 거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바그너 또한 쇼펜하우어 덕후였다)를 열렬히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심 염세주의를 혐오했다. 그는 이를 극복할 방법을 고심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옥과도 같은 사랑의 운명이 니체를 습격했다.


파울 레는 러시아에서 온 당대의 걸출한 여성 루 살로메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했다. 다만 살로메는 여지를 주었는데, 남자 두명과 여자 한명으로 이루어진 지적 동거는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의 동시에 레는 친구이자 철학적 스승인 니체를 떠올렸다. 레는 니체 정도라면 연적으로서 얼마든지 그를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레는 니체에게 살로메를 소개했다. 니체는 평생 고독과 싸워왔다. 당시 그는 아무에게나 충동적으로 청혼을 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만 두번이다. 상습청혼자 니체는 살로메를 보자마자 말했다. “어느 별에서 떨어졌길래 우리는 이곳에서 만난 걸까요?” 살로메가 답했다. “어찌 됐든 나는 취리히에서 왔다오.” 니체는 살로메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사랑에 빠졌다. 그는 살로메에게 두번 청혼하고 두번 거절당했다. 그리고 나서야 3인 동거 계획에 겨우 동의했다.


니체는 살로메에게서 삶의 모든 영역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지로서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살로메와 타우텐부르크의 휴양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그의 삶을 통틀어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레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의기투합한 대로 결국 라이프치히에서 3인 동거 계획을 실행한다. 살로메는 니체를 사상가로 좋아했지만, 남자로서는 아니었다. 니체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 됐든 니체는 그렇게라도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 선택이 참 처량하다.
한 달이 지났다. 레와 살로메가 파리에서 동거를 이어나가자는 제의를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 두 사람이 먼저 출발하겠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홀로 남았다. 그리고 살로메와 함께할 파리의 숙소를 수소문했다. 시간이 흘렀다.
이들이 왜 연락이 없지. 니체는 조금씩 두려워졌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니체는 버려졌다. 그들은 평생 다시 만나지 못했다.


니체는 이후 우울증과 불면증, 그리고 아편에 빠져 두번 죽을 뻔 한다. 니체가 이 기간 동안 친구 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명치가 저린다. 회유했다가, 욕을 했다가, 살로메를 저주했다가, 모두를 용서했다가, 다시 화를 내다가, 도대체 왜 그랬냐고 울부짖는다. 레는 이후 끝내 살로메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별안간 의학을 배워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된다. 그리고 니체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에 자살한다. 살로메는 니체가 죽고 나서 유명해지자 니체에 관한 글을 써서 책을 낸다. 그녀를 욕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루 살로메는 돌처럼 단단하고 새처럼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니체는 이 지옥과도 같은 시간의 참혹한 밑바닥으로부터 광인처럼 기어 올라와 기어이 필생의 저작을 완성해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렇게 쓰였다. 우리 모두 끔찍한 배신에 관련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고통을 계량화하려는 모든 노력이 부질없듯이, 우리가 니체만큼 니체가 우리만큼 괴로웠을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겪은 고통의 색깔이 어떤 것일지는 공감할 수 있으리라. 니체는 삶이 그를 완벽하게 배신했을 때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다. 우리가 죽으면 똑같은 인생이 다시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시간 여행이 아니다. 평행 우주도 아니다. 완전히 토시 하나 바뀌지 않은 그대로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여러 번 읽고 이해한 뒤 토할 뻔했다. 우리가 과거의 인생을 반복하고 있고 그것을 다시 영원히 반복한다는 아이디어는 끔찍한 생각이다. 니체는 정확히 바로 그 공포에 맞서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운명론적 공포를 극복하고, 반복되더라도 좋을 만큼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관없다고, 이토록 끔찍한 삶이라도 내 것이라고 외치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삶을 사랑하라 주문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그 순간 네 삶의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주인의 자세로 껴안고 긍정하라는 아모르 파티와 결합한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고 있을 무렵 그가 영원회귀를 말하면서 누구를 떠올렸겠는가. 당연히 루 살로메다. 그는 그녀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끔찍하고 참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시간마저 모두 부정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타우텐부르크에서의 시절은 니체 인생의 정점이었다. 전에 없었던 기쁨이었다. 삶의 가장 기쁜 순간을 반복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추악한 순간마저 얼마든지 되풀이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되어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니체는 1889년 광장에서 마부에게 학대당하고 있던 말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다 쓰러진 뒤 완전히 미쳐버린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1900년 죽는다.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각되고 연필을 들 의지조차 생기지 않을 때 나는 <즐거운 학문>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예전에 읽으면서 형광펜으로 칠해놓았던 부분만 다시 읽는다. 그리고 그의 삶을 그의 글 위로 펼쳐본다. 그가 “다시 한 번!”을 외칠 때 어떤 표정과 목소리였을지 상상해본다. 그러고 나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슬퍼졌다가 금세 말로 다 할 수 없는 용기가 샘솟는다. 이렇게 글로 쓰고 나니 마음으로부터 어둠이 걷어지고 햇살이 비추어오는 기분이다. 이제 나는 괜찮다. 이 글이 부디 여러분에게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허지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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